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산 이씨 (문단 편집) ==== 금의환향 ==== [[1992년]], 한국이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이훈의 조카인 화산 이씨 26대 이창근씨가 주한베트남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 대사가 직접 대사관 문 밖에 나와''' 이창근을 맞이하였다. 베트남 대사가 한국으로 부임할 당시, 베트남의 역사/문화학자들이 한국에 가면 이용상 왕자의 후손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1995년]] [[3월]], 이창근을 비롯한 화산 이씨 종친회 대표들이 선조들의 고향 [[베트남]]을 방문했다. 이 때 [[도므어이]] 공산당 총비서를 비롯한 [[베트남]] 정부의 [[삼부요인]]이 모두 나와 [[대한민국]]에서 찾아온 화산 이씨 종친들을 맞아 '''깍듯이 황손으로 예우했다.''' 화산 이씨 후손들이 이토록 열렬한 환영을 받은 이유는, 외세의 침입을 물리치고 독립국가를 세워 베트남의 정통성을 확립한 [[태조(리)|리 태조]]와 리 왕조에 대한 향수가 지금도 강하기 때문이었다. 응오 왕조가 10국 중의 하나인 [[남한(오대십국시대)|남한]]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응오 왕조]]-[[딘 왕조]]-[[전 레 왕조]]로 이어지는 동안 분명 잘나가기는 했어도 왕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했고, 응오 왕조 말엽에는 2년간 12 사군 시대라는 내전기도 있었다. 반면 [[리 왕조]]는 무려 200년 넘게 장기 집권했다. 명목상 [[후 레 왕조]]는 중간에 끊어졌던 시기를 제외해도 후기 레 왕조 시기만도 리 왕조보다는 오래 갔지만 그 후기 레 왕조 시기는 허수아비 정권이었다. 이 시기는 [[쩐 왕조]]처럼 멸망 위기급 외침도 없었고, 여러 전란에 휘말린 후대와 달리 안정적인 국정을 운영했다. 쩐 왕조에 의해 리 왕조의 후손들이 멸족된 이후에도 [[베트남]]에서는 현재까지도 리 왕가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화산 이씨가 베트남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왕가의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왕가의 후손들은 생존해 있었으나, 이들은 전부 [[응우옌]]으로 성씨를 바꾼 탓에 리 왕가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노이]] 시장이 제주를 대행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화산 이씨 종친의 방문은 리가의 혈통이 800년 세월을 뛰어넘어 3,600여km나 떨어진 한국에 온전히 남아있음을 확인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당시 현지 언론에서는 '''800년 만에 끊겼던 리가의 혈통이 부활했다'''고 대서특필할 정도였다. 현재까지도 해마다 리 왕조 건국 기념식에 종친회 대표들이 초청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